※창천의 이슈가르드 메인 퀘스트 [최후의 포효] 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가 끝나지 않은 분의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모험가(플레이어)의 묘사 없이 모브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커르다스 중앙고지, 용머리 전진기지. 포르탕 가의 지휘 하에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사람이 좋기로 소문이 난 상사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은 소문대로 꽤나 낙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보통 사대명가의 귀족이라면 초코보를 돌보거나, 훈련에 따라오지 못하는 병사는 타인에게 떠넘기거나 잡일을 하라고 지시하기 마련이다. 용머리 전진기지에 배정되어 그를 지켜본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다. 어떠한 욕심도 없이 모든 병사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되, 뒤처지는 병사는 조금 더 신경을 써주어 타 병사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나의 상사 ㅡ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은 그런 사람이었다.
“울다하에서 모험가요? 혹시, 그 나나모 폐하를 독살하려고 한 그 모험가는…”
“그래, 한창 국가를 대상으로 쫓기는 반란분자를 받기 힘든 너희들의 심정은 잘 이해한다. 앞으로의 용머리 전진기지를 위해서도, 나 역시 그러한 선택을 하지 말아야했다. 많은 생각을 했어. 허나, 그 모험가는 그럴 이가 아니다. 그의 명성이라면 한 나라의 수장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터. 타국을 돕고, 우리 이슈가르드를 도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르슈팡 경, 그 마음은 알겠으나…”
“…미안하네, 너무 내 말만 한 느낌이군. 우선, 너희들의 의견을 묻기도 전에 혼자 결정한 것은 사죄하도록 하겠다. 상관의 위치를 이용할 생각은 없어. 그래도 이번만은 나의 결정을 믿고 기다려 주었으면 한다. 만일, 모험가가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언제나와 같이 해결하도록 하지. …어때, 이정도면 괜찮겠나?”
그는 좀처럼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한낱 모험가를 위해 리스크를 감수할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모험가’는 그에게 중요한 존재일까? 수많은 모험가가 용머리 전진기지에 들렀다. 차디찬 커르다스 중앙고지에서 길을 잃어서, 아도넬 점성대에 가기 위해서. 생각해보면 여태 여러 모험가가 이곳을 들렀지만 모험가를 위해 위험도 감수하겠다니, 자신을 믿어달라니 말을 늘어놓는 그가 낯설기만 하다. 한 번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한 적 없었으나 소중한 것에는 권력도 서슴없이 이용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험가는 며칠 뒤 초췌한 몰골로 용머리 전진기지를 찾았다. 눈보라를 견디며 걸어온 사람이라 하기에는 꽤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나의 상관은 모험가를 저의 거처로 옮겼다. 고집을 부릴 정도로 소중한 모양이니, 생소하지만 이해가 되는 행동이다. 문득, 그의 큰 책상 한 쪽에 놓인 화병에 시선이 갔다. 선명한 보라색의 꽃 한 송이. 커르다스에선 자라지 않는 들꽃인데, 최근에 그리다니아에 가서 상인에게 사 온 모양이다. 가끔은 들꽃도 좋지. 그리 가볍게 넘기며 모험가를 챙기기 바쁜 상관을 대신하여 병사들과 훈련을 하고… 그런 일상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온화하지만 날카로운 상관,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은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을 했기에 단순히 꽃이 예뻐서 장식을 위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지나 않아야지, 책상에 놓인 화병의 꽃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쯤이면 시들 텐데, 할 쯤 생생한 꽃이 피어있다. 용머리 전진기지 주변에 핀 들꽃에는 관심도 없던 이가 꽃을, 예쁘게 다듬어진 자그마한 들꽃을 매일 관리하는 모습이 그가 머리를 다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였다. 고작, 꽃 하나에도 병사를 당황스럽게 만들 정도로 늘 올곧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모험가는 포르탕 가의 손님으로 이슈가르드에 가게 되었다. 어쩐지, 그가 안절부절 못한다 했더니 그런 사람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꾹 닫힌 성도의 문을 연 타국의 사람이 몇 년 만인지. 그 날의 꽃은 잎이 흰 색이었다. 모험가가 들른 이후로 보라색의 꽃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냥 들꽃은 아닌 모양이지. 강철같이 굳센 기사인 오르슈팡 그레이스톤도 인간이었고, 그의 속내는 제법 여리기도 하였다. 마치 커르다스의 냉기를 버티지 못할 저 들꽃처럼. 그는 금방 돌아왔고, 모험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아, 맹우… 아니, 모험가 말이지. 그가 풋내기 모험가일 때 한 번 이곳에 들렀지. 그 순간부터 느꼈지. 그는 단순한 모험가가 아니라고. 분명 위대한 영웅이 되어 먼 훗날 역사가 되어 기록되리라 믿었지. 후후, 나도 몰랐지. 그가 이슈가르드를 도울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꽉 틀어 막힌 국가의 문을 열고,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 그는 더 이상 모험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영웅이지. 본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영웅을 동경하시나요?”
“그래! 동경하는 인물이 맞겠지. 그는 정말로 멋져. 초코보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그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아니, 이 말은 잊어주게. 자! 오늘 훈련이 남았었지? 말을 돌리는 귀 끝이 붉다. 어렴풋이 눈치는 챘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상관은 금방 얼굴에, 목소리에 티가 났다. 그런 상관의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는 성도의 귀족들과는 다른 모습이 그를 향한 충성심을 더욱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영웅’의 앞에서는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을 했다. 눈을 빛내고, 목소리가 높아지며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좀처럼 알기 힘든 사내였다. 속이 여린가, 싶다가도 금방 잘 제련된 철 주괴마냥 단단해진다.
그 날은 유독 날이 좋았다.
왜곡된 역사. 교황청의 진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이 동경해온 ‘영웅’은 그를 밝혀내고자 했다. 신전 기사단의 총장 아이메리크 드 보렐이 교황청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를 구하기 위해 영웅은 교황청을 치고자 하였다. 상관은 자리를 비웠다. 늘 한 송이만 꽂힌 화병은 그 날의 하늘처럼 다채로운 빛이 돌았다. 전진기지를 떠난 이를 기다리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맴돈다. 개혁을 위해서, 성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렇다 하여도 이는 명백한 반란이었기에 그를 우려한 걱정이겠지. 나만은 그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오늘따라 그의 행동이 그립고도, 상기시키니 서글프다. 주인을 기다리는 화병은 시들어가는 꽃을 품는다. 그가 모험가를, 영웅을 기다리던 그 날처럼 보라색의 꽃을 장식한다. 그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화병은 말이 없이 생명을 품는다. 말 없는 꽃은 그 기사를 닮아있다. 햇살처럼 웃으며 영웅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 날의 아주 좋은 기사처럼.
어느 모험가에게 들었다. 그리다니아에서 자라 유통되는 꽃 ‘아네모네’
그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제법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모험가를 향한 나의 동경심 같았지.
그를 동경하고, 혹여나 이 감정이 그것이 아니라 하여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자유로운 새야. 철장에 잠든 내가 아닌, 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국경도, 그 어떤 고난도 그를 막지 못 할 테니까.
“그런데, 아시나요 기사님?”
아네모네의 꽃말은 비극적이지만, 다채로운 만큼 여러 뜻이 있다는 걸.
하얀 아네모네는 희망과 기대.
보라색의 아네모네는 신뢰와 기다림.
붉은 아네모네는 사랑이라고 전해진답니다.
“모든 색의 꽃을 살 수 있겠습니까?”
“추운 날에는 오래 버티지 못해요. 정성을 들이고, 잘 돌봐야 해요.”
“그래도 좋습니다. 마음에 들어서요.”
“보라색과 흰색은 아직 남아있어요. 붉은 아네모네가 없지만… 이거라도 괜찮으신가요?”
그래… 붉은 꽃은 사지 못했었지. 분명, 다른 날에 갔다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끝을 맞이한다면 한 번 쯤은 솔직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살아남아, 한 구역을 맡고 지키며 동료와 의지하며 살아간 나날이.
‘너’ 라는 ‘영웅’을 만나 맹우가 된 이 삶이.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의 ‘방패’로, ‘아주 좋은 기사’의 삶을 살 수 있어서.
그래서 후회는 없다. 아픔도, 슬픔도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소중한 맹우와 함께여서 좋았다.
“슬픈 표정은…… 영웅에겐…… 어울리지 않아……”
흐릿한 시야로 미소 짓는 얼굴이 보인다. 나의 맹우, 나의 소중한.
품에서 꺼내든 그 꽃이 붉다. 석양처럼, 그 날 전진기지의 모닥불처럼 붉다.
나의 희망, 사랑하며 동경하는 이여.
“후후…… 역시 넌…… 웃는 얼굴이…… 좋아……”
다음 미래에는 평범한 소년으로 만나 놀 수 있을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선명한 보라색이 검붉게 변할 쯤, 갓 태어난 초코보를 들어 올리며 좋아하던, 늙은 초코보가 잠들 땐 눈물을 훔치던 그의 얼굴이 스친다. 눈을 뜬 자리에는 엉망이 된 영웅이 붉은 꽃과 함께 미소 짓는다. 태양을 닮은 미소, 그와 매우 닮은 미소. 평범한 들꽃의 이름, 아네모네. 그 아이와 함께 마지막을 장식했구나. 새하얀 희망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구나. 그것이 최후의 말이었구나.
오르슈팡은 그대들을 성도로 초청하겠다고
날 설득할 때 이렇게 말했다네.
" ㅡ 는 제 벗이자 희망입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