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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드러졌던 화원이 저문다. 한순간의 환각처럼. 만발했던 꽃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역시 내게 식물을 기르는 재주는 없다. 아니지, 딱히 식물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지속시키는 덴 소질이 없는 듯해. 바람에 흩날려와 심어본 꽃씨부터 길거리 고양이까지 내게서 온전하게 남지 못했다. 나는 주위를 시들게만 할 수 있는걸까. 그 무엇과도 공생하지 못하나. 그런 거라면 좋겠다. 내가 언제까지고 피어서 주위를 다 말려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 발 딯을 땅은 무너져버리고, 해는 꺼져 떠오르지 않길. 도마의 모든 것이 영원히 불타길. 그렇다면 이 허기도 조금은 채워질 텐데. 하지만 그 유일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내겐 태어날 때부터 불이 붙어 있었다. 도마인이 내게 심었고 자라면서 같이 키워낸 불. 그 화염이 도마에 전부 번지길 바라는데 그러질 못한다. 영웅이란 비가 내게 내리고 있으니까. 날 살리는 비가 아닌 죽여 없애는 비가. 그 비는 너무나도 찬란해서 달을 가리우는 태양이 된다. 날 증발시키는 아침해가 되고. 사막에서 선인장이 힘겹게 꽃을 틔운들, 여명에 말라버리는 밤이슬이다. 


 

  나는 왜 꽃이여야 했을까. 그저 사람이고 싶었는데. 도마인들에게 난 자유도, 의지도 없는 미물일 뿐이었다. 아무렇게나 갖고 놀아도 되는 인형. 내 고통은 외면당했고 그들에게 묻어 없애고 싶은 과거밖에 되지 않는다. 흐르는 눈물과 피는 닿기조차 싫은 구정물과 다를 게 없었다. 가끔 궁금했다. 내가 보이는지, 들리는지. 같은 생명으로 느껴지긴 하는지.



 

  복수를 위해 원한으로 힘을 키웠는데. 증오를 전부 연소하기도 전에 영웅이 나를 처치하러 오는구나. 나는 악일 테니까. 내게는 도마인들이 악인데. 왜 영웅은 내가 어려 핍박당할 땐 등장하지 않았을까? 도움의 손길이나 위로의 말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았을 그땐, 왜 아무도 없었을까.


 

  내게 영웅까지는 필요 없었어. 그건 바라지도 않았다. 학대와 모욕 속에 방치당할 때,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목소리만 있어도 족했다. 구원까지 기도하지 않았으나 왜 이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지. 배움조차 받지 못하고 무지렁이처럼 진창을 구를 때 경멸만이 쏟아졌다. 진정으로 내가 무얼 잘못했는가. 대답은 없다. 탄생이 죄라서 이렇게 괴롭혔을까.



 

  어쩌면 그리 거창하지 않을지 모른다. 단순히 거리의 벌레를 무시하듯 그냥 그들은 지나친 거다. 나는 분명 사람이었는데도, 아무도 나를 사람으로 봐주지 않았으니, 그에 걸맞게 기대에 부응해주며 피었다. 도마 전체가 내겐 폭력이고 방관이야. 너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악마다. 날 뜯어먹은 들개들의 구원자이며. 내 복수를 방해하고 원수를 돕는 위선. 새삼 원망하진 않는다. 너는 오로지 네가 지켜야 할 자들을 위함이겠으니. 다만 나는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다. 파괴하고 싶은 것들만 가득하다. 




 

  이리 될 결말을 미리 알았어도, 똑같은 길을 걸었을 거라 생각해. 후회하지 않아. 이리 꽃으로 허무하게 지는게 아니라 불꽃이 되어 전부 태웠다면 좋았겠지만. 너는 신살자고 나는 악신이니. 권선징악의 동화처럼 끝은 뻔하다. 이곳에 피어나는 월하미인은 나를 데려갈 저승꽃이니. 네가 하나하나 뜯어 으스러뜨릴 악이다. 검붉은 무대로 그 하얀 파편이 흩날린다. 울긋불긋한 배경의 색과는 달리 공기는 얼어붙을듯이 차다. 숨을 쉬는지도, 아직 살아있는게 맞는지도 모르겠어. 죽어서도 내게 안식은 없을 것만 같다. 그 혐오스러운 도마는 영웅 덕에 건재할테니. 날 잊고 묻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단 듯이, 행복하겠지.



 

  단지 한번이라도 사람같이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이젠 바래지다 못해 아득해진 바람이지만. 그러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들을 증오해. 너희들이 지켜야 할 집이란 게 전부 바스라지고 재가 되었으면 좋겠어. 안식이라곤 없었던 삶을 조금이라도 겪어봤으면.

 

  도마란 건 내게 지옥이었거든. 그래서 정말 도마를 지옥으로 만들고 싶었어. 나란 악역을 처치해도, 해방이 와도, 이 나라가 달라지지 않으면 ... 그 지옥에서 나는 다시 피어날 거야. 




 

  그러니 그런 세상이 오지 않길 바란다. 도마가 파멸했으면 하는 소원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는 다시 피지 않게 해줘.

 

  사람이 꽃으로 태어나지 않고, 함부러 꺾여 짓밟히지 않게 해줘. 내가 한번 더, 몇번이고 태어나지 않도록. 꺾어야만 하는 꽃이 없도록. 나는 달빛 아래 밤에만 피는 월하미인이니.




 

  내겐 영웅이 아니었어도, 네가 정말 영웅이라면. 그 같은 어둠은 다시 없게 해주길.

 

  월하미인이 다시 피지 않게 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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